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금성 전투 (문단 편집) ===== 602고지 전투 ===== 사단의 반격작전을 실행하기 이전 먼저 군단 작명 제5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군단은 군대구분을 일부 변경하여 작명 제5호로써 지정된 신주저항선을 조속히 점령 방어하려 한다. >2. 제11사단장 > 가. 7월 15일 18.00까지 신주저항선을 점령 확보하라 > 나. 7월 15일 18.00부로 제1전차대대로부터 1개 중대를 배속받으라. > 다. 7월 15일 18.00부로 미 제5포병단으로부터 제20포병단을 지원받으라. > 라. 제6사단으로부터 포병 FO를 조속히 인수하라. >3.제1전차 대대장은 전차 1개 중대를 7월 15일 18.00부로 제11사단에 배속하라 >4.미 제5포병단은 제20포병단으로 하여금 7월 15일 18.00부터 제11사단을 지원케 하라. 제11사단은 군단의 이러한 조치로써 강력한 포병 지원 및 전차지원을 받게 되었으며 이외에도 군단포병과 미 제461중박격포 대대의 지원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사단은 7월 15일 05시에 사단의 신주저항선 A의 우일선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수행한 제13연대에게 425-602고지선까지 진출하라는 명령을 하달했고 이에따라 13연대는 제1대대를 주파리 서북쪽 567고지-750고지 간에 전개시켜 해당 선에서 공격을 개시하여 추동리 좌측방 무명고지에 위치한 중공군을 섬멸하고 이 일대를 점령한 다음 계속 진격하여 425고지선까지 진출하도록 명령했고 제3대대는 연대 중앙일선으로 조정해 서막동 북쪽능선에서 공격을 개시하도록 한 뒤 이후 425고지 서쪽 1km 지점에 있는 무명고지와 그 일대를 완전장악하도록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제2대대는 좌일선으로 삼아 750고지-793고지를 점령하고 658고지를 탈취한 다음 요충인 602고지를 공격탈취토록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작전을 세우는 와중에 뜻밖에 일이 발생하고 마는데 왜냐하면 오전 10시에 제1대대 전면에서 중공군 1개 중대가 출현하여 그 주변을 정찰하고 있었음에도 대대장은 이들이 너무 기세등등하게 출현하여 왔기 때문에 적이 없다고 오판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정찰 헬리콥터 한대가 그들에 의해 격추되어 대대op에 떨어지자 대대장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고 서둘러 사격금지령을 내린 뒤 연막탄이 하늘에 솟구치면 그때 사격을 하여 섬멸하라는 지시를 제1중대에게 하달한다. 이에따라 제1대대 제1중대는 중공군이 오길 기다리면서 몸을 수그린채 초긴장 상태가 되었는데 여기서 중대의 간절한 부탁을 들어주듯 중공군들은 아무것도 모른채 1중대 전면에 접근하여 어느새 7~8m까지 초접근하게 되었으니 이는 마치 악어 입에 스스로가 자진해서 들어가는 꼴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연막탄이 하늘에 치솟자 전 중대원들이 중공군에게 사격을 가하였으며 중공군은 이 사격에 의해 순식간에 분산되어 저항 한번 못한채 남하하면서 도주하다 중대원들의 집중사격에 결국 모두가 도륙되 거의 대부분의 인원이 죽었다고 한다. 이후 중대는 현장을 수습하며 시신을 확인하였으니 그 시신수만 무려 87구였고 그들의 무기를 모조리 노획하는 전공을 세웠는데다 포로 2명을 획득하는 전공도 세우게 된다. 당시 1중대장이었던 김영돈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참 통쾌한 일전이었다. 한놈도 놓치지 않았는데 그중 2명을 사로잡아 심문하였더니 아군은 이미 철수하여 없는 곳인줄 알고 주파리 일대의 정찰을 목적으로 출동중이었다고 하였다. 이때 시체를 확인하면서 발견한 수통에는 '위스키'가 가득 차 있었고 '파이프' 겸용의 피리를 전원이 소지하고 있었다. >---- >김영돈, 당시 제1중대장 이와같이 중공군의 정찰중대를 섬멸한 연대는 제2대대로 하여금 602고지 일대에 거점을 두고 침입을 기도하는 중공군을 막기 위해 그들을 섬멸하도록 조치하였고 이에따라 제2대대는 16시에 제6중대를 750고지 북쪽하단에 진출시켜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후 중대는 658고지 서남 하단까지 통과해 19시쯤 목표 750m까지 접근하였을 무렵, 700고지에서 약 2개 소대규모의 중공군이 출현하여 중대의 진출을 방해하며 공격을 가하였다. 이에 중대는 60mm 포로써 그들을 모두 섬멸케하였으며 게속 진출하여 700고지의 7부 능선까지 접근하는데 성공하였는데 여기서 집중포격으로 인하여 중대는 돈좌상태에 빠져 결국 동고지의 5부 능선을 목표로 후퇴하게 된다. 그 직후, 중대는 그곳에서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먼저 고지정상에 포격을 날린 뒤, 20시, 다시 재공격에 나서 700고지의 8부 능선을 점령하는데 성공했고 이윽고 고지 정상까지 치달아 그곳을 방어하던 중공군들과 치열한 육탄전을 전개해 20시 30분에 700고지의 정상을 탈환하는데 성공한다. 이렇게하여 700고지를 탈환한 중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 200m 북쪽에 위치한 무명고지까지 쇄도해 교전거리 50m가 채 되지도 않는 육박전에서 약 1시간 간의 격전끝에 이를 탈환했고 그 결과 700고지 주변 일대를 완전장악하게 되었다. 그 뒤, 제2대대장은 제6중대로 하여금 중공군의 역습을 대비케 하였고 7,5중대를 무명고지 능선에 추진시켜 야간공격을 대비하도록 하면서 602고지에 대한 공격준비를 완료하게 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wpl[gwpgpl.png|width=100%]]}}} || || 후동리 전투 경과도, 7월 16일~17일까지 || 이후 하루가 지난 7월 16일, 제13연대장 박응규 대령은 제2대대에게 602고지를, 제3대대에 602고지 동쪽 1km 지점의 무명고지를 각각 공격하도록 명하였으니 제3대대는 이러한 연대장의 명령에 따라 오전 06시를 기해 우일선의 제9중대를 동막동 서쪽의 금성천 연안을 따라 전진하도록 지시를 내린다. 이에 중대는 금성천 서안의 만곡부까지 진출하여 그곳에서 우로부터 제1,2,3소대 순으로 산개한 다음 진출한 전차대의 지원을 통해 전차포로써 전방 200m에 위치한 무명고지를 순식간에 제압하였고 제9중대는 제1소대로 하여금 제2,3소대의 지원을 받으면서 공격케 하여 오전 10시에 동고지를 점령하는데에도 성공한다. 한편, 제3대대 제10중대는 오전 06시에 LD선(567고지 북단)을 통과하고 목표 475고지를 향해 진출하다가 10시에 동고지 서단에서 중공군의 맹렬한 포격을 받음과 동시에 중공군 2개 소대가 출현하여 중대의 진출을 방해하고 있었고 이리하여 중대는 이들과 전면으로 격돌해 혈전을 치르게 되었으나 중공군의 치열한 집중포화로 인하여 결국 중대는 10시 50분에 567고지 북쪽 능선으로 물러서게 되었고 그곳에서 재정비를 해 다시 재공격에 나섰지만 중공군의 포격으로 인해 또다시 실패하고 만다. 이렇듯, 제10중대의 진출이 중공군의 저항으로 인해 가로막히게 되자 대대장은 중대를 475고지 서측방으로 우회시켜 9중대가 점령하고 있는 진지의 남쪽 1km에 위치한 무명고지를 탈환하도록 조치하였으며 이에 우회공격을 시도한 중대는 21시 50분에 목표 무명고지를 탈환하는데 성공하였고 이로써 475고지 퇴로가 막힌 중공군들은 이후 야음을 틈타 금성천 너머로 퇴각시도 중 그곳에 매복하고 있던 연대 수색대들에게 걸려 궤멸하게 되었다. 이때, 제11중대는 06시에 LD선을 출발하여 15시에 목표 602고지 동남쪽의 무명고지를 탈환했고 제10중대의 공격이 끝나자 진출한 예정선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며 공격준비를 갖추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RPRGRLRPG.png|width=100%]]}}} || || 602고지 전투 경과도 || 하여튼, 이러한 방식을 통해 제3대대는 이날 공격에 성공하였고 예정선에서 병력과 방어를 재정비하는 동안 제2대대는 기도비닉을 유의하여 야간공격을 하도록 연대장에게 제의했는데 이에 연대장은 제2대대의 야간공격을 그 즉시 승인했고 이후 23시에 대대는 목표 602고지 일대는 물론 중공군의 후방 보급로도 차단하면서 제7중대를 공격제대로 삼고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때 7중대는 5중대의 지원하에 공격을 감행하였는데 이에따라 7중대는 제1소대를 우일선으로하여 동쪽을 우회 공격토록 했고 제3소대를 예비대로 둔 다음 2소대를 좌일선으로 지정해 23시 LD선을 통과한 다음 각 소대들에게 기동을 실시토록 해 야음을 타고 계속 진출하였는데 여기서 우측 우회를 한 제1소대가 0시 30분, 목표 70m 이내까지 접근하자 곧 중공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결국 교착상태에 빠지고 만다. 물론 제2소대가 협공을 해 공격의 진전이 있는듯 했으나 상술한대로 중공군은 방망이 수류탄과 자동화기를 무차별적으로 퍼부었기에 화망을 뚫지 못하였고 이후 남쪽으로 철수를 감행해 그곳에서 다시 공격을 재개할 준비를 하게 되었다. 이때 대대가 마주친 중공군은 고참병만 무려 전체인원의 90%에 달하는 제54군의 예하 135사단이었다. 이렇게 제13연대 602고지 공격작전이 어렵게 진행되기 이전, 제9연대는 7월 16일 09시까지 제3대대를 봉닥덕리-633고지에, 제1대대를 633고지 북단-간진현까지 전개토록 하고 제2대대를 633고지-735고지 간에 종심으로 배치하여 중공군의 침투를 차단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633고지와 462고지 사이에 돌출한 587고지에 주둔한 중공군이 이를 방해하고 있었고 연대는 이를 격멸시키기 위해 제3대대에게 567고지에 주둔한 1개 중대규모의 중공군을 격퇴하도록 지시를 하달했다. 그렇게 14시 30분을 기하여 공격에 나선 제3대대 제11중대는 돌격을 감행해 8부 능선을 차지 후 고지 정상을 향해 공격을 가하였으나 중공군의 치열한 저항에 부딪쳐 약 30분간의 교전끝에 이를 격퇴시키고 고지를 점령하였다. 이 공격이 성공하고 하루가 지난 7월 17일, 사단은 각 연대의 반격상황을 종합해 보았는데 각 연대의 상황은 먼저 13연대의 경우 목표 602고지 일대를 탈환하지 못했으며 제9연대는 587고지를 탈환하였으나 552고지는 탈환치 못하였기에 사단은 제9연대에게 633고지 서측방의 462고지를 점령하여 미 제3사단과 연결한 뒤 552고지에 대한 공격계획을 세우도록 지시하고 제13연대에게는 602고지를 탈환하라고 지시하였다. 따라서 사단 우일선 제13연대는 우일선의 제1대대로 거리실과 금성천 만곡부 서안에 접한 406고지를 점령하라고 지시했으며 중앙의 3대대는 425고지를 그리고 좌일선 2대대에게는 602고지를 점령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렇게하여 연대의 명령이 하달된 바로 그 순간 서측방으로 우회한 일부병력이 중공군의 후방으로 잠입하여 돌격을 감행하고 이와 동시에 대대주력이 정면공격을 개시하자 수류탄전과 백병전이 전개되었고 이윽고 중공군을 몰아내어 3시 55분, 602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더불어 대대는 602고지를 점령 후 고지 북쪽의 A, B, C고지마저 점령하였다. 여기서 602고지가 탈취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제13연대장은 제1대대의 1중대에게 1개 전차 소대를 배속케 하였는데 여기서 제1대대는 제1중대를 우일선으로, 제2중대는 예비대로, 제3중대는 좌일선으로 전개해 목표 거리실과 406고지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후 시간이 지난 오전 06시, 대대는 공격에 나서게 되었는데 제1중대는 연대장의 조치에 따라 전차 1개 소대를 받아 전차 소대를 전방으로 내세우고 금성천 연안을 따라 목표로 달려가기 시작하였는데 여기서 금성천 연안의 지형적인 문제가 발생하였다. 당시 금성천 연안은 전차와 보병이 함께 기동하기에는 용이한 지형이었으나 어느곳에서나 감제 가능한 곳이고 또 그로인해 중공군의 직사화력에 당할 수 있는데다 전세가 불리해지면 퇴로마저 차단될 위험이 매우 높았다. 따라서 제1중대장은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하였다고 진술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금성천 연안을 공격로로 택하기 보다는 후동리 동북쪽 능선의 배사면을 타고 공격하는 것이 기도비닉에 있어서나 적의 직사화력을 피하기에 용이할 것으로 판단하고 후자로 택하기로 주장하였지만 전차와의 협동공격이 안된다는 이유로 전자를 택하도록 지시를 받았다. >---- >김영돈, 당시 제1중대장 중대는 퇴로차단 및 적의 직사화력등 여러가지의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전차협동 공격을 위해서는 금성천 연안 공격로를 이용해야한다는 상부의 반응에 의하여 결국 금성천 연안을 이용하여 목표로 치닫게 된다. 당시 공격을 개시한 중대는 금성천 만곡리에 도달했을 무렵에 중공군이 406고지,425고지에서 일제히 포문을 열어 집중사격을 퍼붓고 이와동시에 1개 중대 병력이 배사면에 출현하여 격렬히 저항하는 바람에 중대의 진출이 돈좌되어 이들과 혈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아까 말했듯 지형적인 요소로 인하여 중대의 퇴로가 차단될 위기에 놓였고 중대는 사실상 진퇴유곡(進退維谷)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혼란한 상황 속에서 제1중대장 김영돈 대위는 신속한 조치로써 전차의 엄호를 받으면서 서북쪽 능선에 치달려 위급상황을 피하였으나 전차소대는 중공군의 직사화력을 정면으로 얻어 맞았기 때문에 전차 대부분이 손상되어 있었고 그중에서 2대는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다. 이는 2군단 작전상보에서 사단의 전차 손실로 기록되어 다음과 나타난다. 2군단 전차부대 피해[* 출처: 作戰詳報, 第二軍團司令部, 53p] || 부대 || 제6사단 || 제8사단 || 제5사단 || 3사단 || 7사단 || 11사단 || || 전사 || 1 || 3 || || 1 || - || - || || 부상 || - || 21 || 12 || 3 || 6 || 5 || || 실종 || - || 4 || - || - || - || 2 || || 전차 || - || 7 || 3 || - || - || 2 || 여하간 중공군의 집중사격과 역습으로 인해 공격이 좌절된 중대는 이후 명령에 따라 철수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중공군의 차단사격에 의하여 중대는 곤경에 빠졌다가 간신히 원위치까지 철수하게 되었으며 이후 대대는 작전을 변경해 야간공격을 감행하려고 했으나 여기서 425고지를 공격한 제3대대가 중공군의 역습에 밀려 1km 아래로 밀려나게 되자 연대장은 406고지 공격을 일단 보류하고 제1대대에게 425고지 공격임무를 변경 및 부여하였기에 제1대대는 406고지 공격을 425고지로 변경하게 된다. 또 연대는 406고지 공격 실패를 대대장에게 책임지어 대대를 기존 대대장의 지휘에서 부대대장 지휘로 변경조치하였고 이렇게 공격목표와 지휘체계가 바뀐 제1대대는 제1중대로써 공격제대로 삼아 18시를 기점으로 425고지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게 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OPKGOKPEKO.png|width=100%]]}}} || || 425고지 전투 경과도 || 이때 제1중대에서는 425고지에 대한 공격작전을 하나 세웠는데 먼저 제1, 2소대를 후동리 북쪽 능선의 동서 양사면을 타고 전면으로 진출케 하도록 하며 제3소대는 예비로 있다가 양소대의 공격이 좌절되면 이를 초월키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격을 실행한 제1, 2소대는 전면으로 돌격해 나가 425고지 8부 능선까지 접근하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중공군의 저항이 매우 치열함에 따라 중대장은 예비대 3소대를 이끌고 나가 목표 서측방을 우회하여 측면에서 깊숙히 잠입한 다음 때를 마쳐 소대장의 돌격 소리가 울리니 잠입하고 있던 소대원들은 이 돌격소리를 듣자마자 총검을 휘두르며 적진으로 쇄도하게 되었으니 중공군의 화망으로 인해 고전중인 1, 3소대도 그 소리에 의거하여 전부 돌격해 나아갔다. 결국 그토록 지독하게 저항하던 중공군들도 중대의 힘찬 돌격에 의해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고 더 이상 버틸수가 없다고 판단한건지 시신 27구를 현장에 방치한 채 분산도주하고 말았다. 이렇게 425고지를 탈취한 중대는 시간을 확인하여 보니 자정에 가까운 20시라서 서둘러 병력을 재정비하도록 조치했고 그 뒤, 사주방어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부터 중공군의 포격이 시작되었으며 곧 중공군이 역습을 가하여 425고지를 탈취하려고 달려들었다. 이에 중대장은 반사주방어로써 이를 해결해 달려들은 중공군들을 분쇄하였다. 한편, 제3중대도 이날 13시에 거리실까지 접적 없이 진출하여 목표 고지 약 200m에 이르게 되었으나 이곳에서부터 시작되는 중공군의 포화력으로 결국 더 이상 전진할수가 없었기에 중대장은 지원포를 유도해 강행케 하고 15시에 1소대를 서쪽을 우회하여 측배에서 협공을 하도록 하였다. 또 제2, 3소대를 중대장이 직접 지휘하여 전면에 진출시키도록 조치를 취했다. 이리하여 중대주력은 우비와 같이 쏟아지는 중공군의 포탄세례를 뚫고 7부 능선에 접근하는데 성공하였으며 곧바로 돌격을 감행하려 했으나 중공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돌격 개시가 어렵게 되어 이후, 교착상태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이때 서쪽으로 우회한 제1소대가 측면에서 화력을 집중시켜 돌입하자 중대장은 돌격을 외치며 주력을 휩쓸고 나아갔고 여기에 중공군들은 그 기세에 눌린듯 당황하여 제대로 된 저항도 못하다 유기시체 23구를 남기고 전투현장에서 도주하였다. 중대는 이러한 공격으로써 마침내 목표를 탈환했으며 20시 30분, 중대는 고지를 탈취하면서 생긴 흩어진 병력들을 정비하면서 동시에 사주방어에 돌입하였는데 얼마못가 22시쯤 제2중대에게 임무를 인계하고 제2중대는 해고지 북쪽 200m에 위치한 무명고지를 탈환하여 탈환구역을 더욱 더 넓혔다. 제3중대는 임무를 인계한 후, 후동리 전진하여 대대의 예비대가 되었다. 이번 작전으로 생긴 피해와 전과는 다음과 같다. || 사살 || 629 || 전사 || 14 || || 포로 || 3 || 부상 || 123 || || 기관단총 || 12 || 실종 || 11 || || 다발총 || 47 || 계 || 148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02349.png|width=100%]]}}} || || 제13연대 제1대대OP에서 전황을 시찰하는 사단장과 참모들 || 후동리 전투가 끝날때쯤 제13연대 제2대대도 602고지를 탈환 및 전방의 솟아난 3개의 봉우리인 A, B, C등을 모두 점령하여 재정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17시 30분부터 중공군의 포격이 시작된 이래 22시경에는 무려 3,000여발의 포탄이 602고지와 대대OP 일대에 낙하했고 이후 30분이 지났을때에는 증강된 1개 대대규모의 중공군이 602고지와 A, B, C고지 정면에 출현하여 3면에서 포위망을 좁혀오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대대장은 A, B, C고지를 방어하던 제5중대를 602고지로 철수시켜 제6중대와 함께 중공군을 차단하라고 지시하였으나 제5중대가 602고지로 가기도 전에 602고지에 주둔중인 제6중대가 고지 동측방으로 침투한 중공군들의 공격으로 인하여 철수하게 됨에 따라 602고지는 중공군에게 피탈되고 말았다. 즉 제5중대는 퇴로인 602고지마저 차단되었기에 완전히 포위되었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 제5중대장은 602고지 탈환작전에서 입었던 부상으로 인하여 정신을 그만 잃고 말았고 제1소대장이 흔들어 깨우고 나서야 명령을 내릴수 있게 되었는데 당시 소대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그를 깨웠다고 한다. >중대장님! 적세가 날로 증강되어 분초를 다투는 위국입니다. 이대로 포위망 속에서 떼죽음을 당할 수는 없습니다! 어서 용단을 내려주십시오! >---- >제1소대장 정상영 소위 이에 중대장은 중상을 입은 몸으로 이러한 유언을 남기게 되었다. >중대를 정 소위에게 맡긴다. 포위망을 뚫고 살아거던 대대장님께 중대장은 최후까지 싸우다 죽었다고 전해다오 >---- >제5중대장 김길상 중대장은 이 한마디를 끝으로 과다출혈로 결국 운명하게 되었으며 그의 죽음으로 곁에 있던 소대장은 그의 유언대로 반드시 포위망을 뚫기 위해 즉각 중대 선임하사관에게 특공대 5명을 선발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선임하사관을 조장으로 한 특공대가 서남쪽 포위망을 격파할 기세로 화력을 집중하는 사이 정 소위는 중대를 이끌고 동남쪽 포위망을 돌파하고 활로를 열기 시작하였는데 때마침 제7중대가 동고지 남단에서 중대의 퇴로를 엄호했으며 이와 동시에 포병의 연막탄 지원도 오게 되면서 중대는 무사히 포위망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렇게 중대가 포위망을 벗어난 직후, 대대는 다시 602고지에 대한 역습을 준비하였으나 연대장은 제2대대가 602고지를 다시 탈취하기에는 매우 어렵다고 판단했고 대대의 602고지 공격을 유보시키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리고 연대장은 공격을 유보시킨 다음 사단장에게 증원요청을 했으며 이에따라 사단장은 다음과 같은 작전지시를 하달해 제20연대 1개 대대를 제13연대 예하로 배속시키게 되었다. 제13연대 제2대대의 전과와 피해[* 출처: 第十一師團 第十三聯隊 金城地區 602高地 戰斗詳報, 4p] || 사살 || 120 || 전사 || 58 || || 추정 살상 || 241 || 부상 || 206 || || 노획무기[* 중기관총 2정, 경기관총 2정, PPSh 기관단총 30정, 기관단총 3정, 동탄창(同彈倉) 12개, 수류탄, 10발] || 76 || 실종 || 90 || || 포로 || 2 || 계 || 354 || [[파일:rejioerjirjiorgjiureojreiujgreiuge.png]] >1. 사단은 7월 D일 H시를 기하여 602고지를 탈환하려고 한다. >2. 제13연대장 > 가. 7월 18일 12.00부로 제20연대 1개 대대를 통합 지휘하라 > 나. 7월 D일 H시를 기하여 602고지를 탈취하라 >3. 제20연대장은 7월 18일 12.00부로 예하 1개 대대를 제13연대에 배속하라. >4. D일 H시는 7월 18일 16.00이다. 제20연대 3대대는 해당 명령문에 의거해 13연대로 배속되어 16시에 602고지 남쪽 500m 무명고지로 추진되었고 약 1시간이 지난 16시를 기점으로 포병의 지원과 함께 공격에 나서게 되었다. 공격에 나선 대대 주력은 3시간이 경과한 후 고지의 8부 능선까지 접근하는데 성공하였으나 고지 뒷편에 숨어있던 중공군들이 수류탄과 기관총을 난사하는등의 격렬한 저항을 펼쳐 결국 6부 능선으로 물러서게 되었으며 약 30분 후, 포격지원을 등에 업고 공격을 재개해 중공군과 백병전을 전개하여 20시 30분, 602고지를 탈취하였다. 그런데 1시간 후 중공군이 후속병력을 대동한 채 3면에서 압박을 가하면서서 공격을 가하여 왔으므로 대대는 박격포를 적극 이용하여 저항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결국 밀려나게 되면서 602고지는 피탈되게 된다. 이러한 소식은 곧 사단장에게도 바로 알려졌고 사단장은 격노하여 연대장들을 질책했으며 602고지 탈환임무를 13연대에서 20연대로 교체하게 되어 이에따라 제20연대 1대대를 602고지 남단인 삼현으로 출동시키게 한다. 한편, 제9연대는 새벽 1시 30분쯤 633고지 서북쪽에서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았으나 포병의 지원하에 이를 모두 격퇴시켰고 연대 수색대에게 552고지에 대한 공격임무를 수행토록 하였다. 수색중대는 정면공격과 동시에 동서 양측방에서 배후를 공격하도록 공격임무를 배정했으며 이어 지원포격과 항공기 지원을 얻은 뒤, 20시를 기점으로 총공격을 가해 22시 30분경에는 8부 능선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때부터 중공군은 바위와 수류탄을 던지면서 격렬하게 저항했고 돌격을 차단해 중대를 교착상태에 빠지게 만든다. 이에 중대장은 특공대를 편성하여 중공군의 후방을 공격하기로 결심했고 그리하여 선정된 7명의 특공대가 포복으로써 배후로 잠입해 곧 돌격을 감행하면서 정면에 진출한 중대 주력이 돌격시키도록 하였다. 이로써 돌격에 성공한 중대는 552고지 정상에 순식간에 쇄도했고 정상 부근에서 격전을 벌이다 23시 50분쯤 522고지를 탈환하는데 성공한다. 이렇게 9연대가 522고지를 탈취하는 무렵, 제2군단장 정일권 중장은 중공군이 후방보급과 함께 병력을 증원하여 압력을 가중할 것으로 판단하고 군단예비인 7사단을 투입해 제11사단의 우일선의 일부 주진지와 8사단 좌일선의 일부진지를 인수토록 명령하였다. 또한 군단의 명령에 따라 제11사단은 제13연대 진지를 7사단에게 인계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사단은 군단작명 제8호에 의거 제13연대 작전임무를 제7사단에게 인게하려 한다. >2. 제13연대장 > 가. 7월 20일 04.00까지 주진지를 제7사단 제8연대에 인계하라. > 나. 교대완료 후 서막동에 집결하여 사단 예비가 되라. > 다. 7월 19일 06.00부로 예하 1개 대대를 제20연대에 배속하라. > 라. 7월 20일 08.00부로 사단수색중대의 배속을 해제한다. >3. 제20연대장 > 가. 연대는 현 담당지역을 조속히 점령 확보하라. > 나. 제13연대에서 7월 19일 06.00부로 배속되는 1개 대대를 통합 지휘하라. >4. 제9연대장은 현 임무를 계속 수행하라. >5. 사단수색중대는 7월 20일 08.00부로 제13연대로부터 배속을 해제, 사단 지휘 하에 복귀하라 제13연대는 위에 나왔듯, 602고지 임무를 20연대에게 인계하고 20연대 3대대도 원대복귀 조치를 취한 뒤, 사단의 예비대가 되었다. 그리고 제20연대는 제1대대를 602고지 남단 500m까지 진입시키고 연대 전방 지휘소도 658고지로 이동 조치하였으며 사단으로부터 사단 박격포 중대를 배속받아 화력도 더욱 강화되었다. 아울러 연대장은 602고지에 대한 공격 재반 상황을 검토한 후 제1대대에게 602고지 남쪽 기슭에서 역습을 준비중인 제3대대와 함세하여 목표를 탈환하라고 지시함과 동시에 제1대대장은 제1중대와 제3중대에게 공격임무를 부여하는 한편, 현존 병력이 1개 중대에 불과한 제3대대에게는 측방지원을 요청하였다. 이후, 시간이 지나 12시 31분이 되자 각종포화가 602고지 정상에 집중되었으며 제1대대 제1중대는 목표 고지 전방으로 진격하여 100m 전방에 도달했으나 중공군의 측방화력으로 인하여 결국 7부 능선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이때 시기에 대해서는 군단 작전상보와 11사단 20연대 전투상보랑 상당히 차이가 나는데 먼저 군단 작전상보의 경우, 1,3대대가 LD선을 통과한 시기는 12시 31분이며 13시 30분에 602고지에 대한 총검돌격을 개시했다고 서술한 한편, 연대 전투상보에서는 12시 20분에 LD선을 통과했고 이후 13시 10분에 돌격을 개시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보고체계에 혼돈이 빚어져 발생한 일로 추측된다.] 중대는 7부 능선에서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다시 공격에 나섰으나 이번에도 중공군의 탄막을 돌파하지 못하여 중대는 다시 물러나 근접항공지원을 요청해 F-51 편대가 목표지점에 약 3차례에 걸쳐 폭격하도록 하였고 대대장에 의해 합류한 제3중대와 같이 연대장의 지시대로 서측방으로 즉시 이동하여 그곳에서 돌격을 감행하게 되었다. 이때 동측방과 정면에서는 1대대가, 서측방에서는 3대대가 다 같이 함께 돌격을 가하였으며 이때문에 완강히 저항하였던 중공군도 결국 대대의 총검돌격에 의해 완전히 분산되어 A고지 방면으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제1대대는 즉시 A고지와 B고지로 돌격하여 A,B고지 모두를 점령하게 되었으니 제13연대가 잃은 실지의 절반 이상을 회복한 셈이었다. 당시 602고지를 점령한 대대의 전과는 다음과 같다.[* 출처:作戰詳報, 第二軍團司令部, 296p] || 사살 || 200 || || 추정살상 || 404 || || 경기관총 || 3 || || 소총 || 50 || 다만 이때 상황은 그야말로 처참하기 그지 없었는데 당시 제1대대의 1중대의 경우 전투가 끝나자 잔존 병력이 '''중대장 포함해서 총 8명 뿐이었고''' 제3대대의 경우에는 42명의 전사자와 249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여 말이 대대지 실제로는 1개 중대도 채 되지도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